논평2016.05.20 14:10

살아남은 스물넷 여성의 일기

-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여성을 추모하며 -


5월 17일 저녁, 집 앞을 찾아 온 친구와 늦게까지 수다를 떨며 술잔을 기울였다. 한참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늦은 새벽에 택시를 타고 가는 친구에게 메신저로 번호판 넘버를 찍어 보낸다. 

"조심히 들어가, 도착하면 연락 해." 

라는 인사와 함께. 택시 번호를 찍어 보낸다고 만에하나 친구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도 조심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저 이렇게라도 해야하니까. 조그마한 걱정을 하고 있다가 잘 귀가했다는 답신을 받았다.

편히 늦잠을 자고 일어난 점심때 쯤, 우리가 즐겁게 놀고 있었을 그 시간에 강남 어느 노래방의 공용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칼로 수차례 찔러 목숨을 잃게 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는 공용화장실에 들어가 피해자인 '젊은 여성'이 들어올 때까지 1시간여를 기다린 뒤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 남성의 살해 동기는 단순했다. 

'평소에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번화가에 놀러 와서 나와 친구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스물 셋 내 또래의 이 여성은 이날 자신의 죽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여성이기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앙심을 품은 남성의 혐오살인의 대상이 된 것이다.

두려워졌다. 

처음도 아닌 이런 사건의 피해자는 나도, 나의 주변 사람도 될 수 있었을텐데.

우리는 새벽에 강남이 아닌 집 앞 술집에 있었던 것 뿐이다. 무거운 마음이 든 채로 SNS에 공유된 관련 기사들을 보니 언론들은 명백한 젠더사이드 사건을 두고 묻지마 살인, 우발적 범죄같은 표현으로 이 사건을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고 가해자가 목사를 꿈꾸던 신학도였다는 식의 스토리텔링마저 하고 있었다. 댓글창은 가히 '댓망진창' 이었다. 여성혐오에 분노하고 "남 일 같지 않아 불안하다." 라는 여성들의 글에 "나와 내 주변은 이렇지 않다. 일반화가 불편하다", "남자가 당할 땐 뭐라고 할거냐." "또 성별대결 하지 말아라." 같은 답글들이 줄줄이 달리고 있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귀가 길이나 혼자 자취를 하면서 범죄로부터의 불안감을 느껴보지 않은 여성이, 밤길 조심하고 일찍 다니라는 충고를 들어본 적 없는 여성이 얼마나 있을까? 살인하지 말라고, 강간하지 말라고 하기보다 먼저 당하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하면서 내 주변을 경계하지도 말라고 한다면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는걸까? 뉴스에서 나오는 수많은 사건들을 보며 부모님이 "너도 밤길 조심해라." 하실 때마다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렇지 않고는 방도가 없을테니까. 누구도 이렇게 '조심'하는 여성들의 생존에 무관심 하기 때문에.

어릴때 부터 '여자아이' 이기 때문에 겪었던 미묘한 차별과 불편들에 대해 어떤 남성이라도 전부 공감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오늘 볼 일을 마치고 강남역으로 향했다.

역으로 가는 버스에서, 잠깐 들린 빵집에서, 공원에서 마주친 많은 여성들이 지난 새벽의 이 사건에 대해 불안해하며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 당장 외출을 해도 공용화장실을 갈 때마다 두려움을 느낄것이다.

도착해서 가득 붙은 포스트잇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렸다. 놓여진 꽃다발들이 전부 영전에 놓일 하얀 꽃들이라는 게 화가 났다. 살아서 죄값을 받을 그 남자가 끝내버린 당신의 생이 남아 있었더라면 빨갛고 노란 예쁜 꽃들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을텐데.

"오늘 죽을지도 모르는 여자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라는 포스트잇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이 글을 쓰고있는 새벽, 페이스북에는 생존신고를 하는 여성들의 글이 넘쳐난다.

오늘도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5월 19일 강남역 10번출구 청년녹색당 정당연설회 "나는 여자라서 죽었습니다" 중에서


청년녹색당

2016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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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년 녹색당